즐거운 편지_ 황동규
by NUGA- 영화 <편지> (1997)
즐거운 편지
-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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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삼남에 내리는 눈 (1975)>에서
Comment.
2001년,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에게 인생처럼 다가온 시였다.
은사이자 시인이셨던 故 김경춘 선생님께서는 '소나기'를 가르쳐주실 때 즈음,
열살 남짓한 아이들에게 영화 <편지>를 꼭 보고 오라는 숙제를 내려주셨다.
알림장에 꾸욱꾸욱 눌러썼던 이 숙제를 위해 아이들은 동네에 있던 비디오 대여점에 우르르 몰렸고,
15세 관람가였던 영화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모두 부모님께 전화를 해야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화 감상 숙제. 사전지식도, 관심도 없이 무작정 보기 시작했고,
우리는 선생님이 귀띔해주신 한 편의 '시'를 찾기 위해 끝까지 보았다.
남주인공 박신양이 최진실에게 보냈던 한 통의 편지,
영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이자 사랑과 감정의 매개체 역할을 했던
편지에는 한 편의 시가 함께 적혀 있다. 제목은 '즐거운 편지'.
반어법으로 시작된 이 시는 사랑의 영원함을 약속하기보단
인생과, 시간과, 계절의 흘러감에 자신의 자세를 일치시키며
사랑의 대상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섬세히 묘사한다.
열 한 살의 가을에 보았던 영화와 시.
김경춘 선생님과 <편지>와 '즐거운 편지'는 내 자아 형성의의 가장 밑바탕이 되었고,
사춘기 남학생에게 처음으로, 그리고 스스로 성숙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16년 전을 떠올리며,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편지>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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